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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 바깥의 세계≫, 정원 평론


정원의 벽은 공간 한가운데 떠 있다. 빛을 투과하는 반투명한 벽돌들이 바닥에 여러 색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태양의 이동에 따라 벽의 그림자는 함께 움직일 것이다. 〈숨을 위해 엮은 벽돌들〉(2025)은 서로를 연결하는 끈의 긴장으로 각자의 자리를 유지한다. 엇갈려 놓인 벽돌들이 서로 약간의 간격을 두고 공중에 부유하기 때문에, 벽은 굳건히 서서 공간을 구획하는 대신 앞에 선 사람이 쉽게 반대편을 내다볼 수 있게 한다. 정원은 우뭇가사리와 감자 전분을 끓여 만든 바이오페이퍼(bio-paper)에 그간 머물렀던 현장에서 수집한 마른 풀을 섞어 조형한 벽돌을 낚싯줄로 고정하여 띄워두었다. 이들은 푸른 강의 색을 닮았거나 표면이 찢어져 내부가 들여다보인다. 연약한 벽돌들처럼, 같은 공간에 놓인 다른 작품들 역시 형상을 빌려온 도구의 목적을 이룰 의도가 없어 보인다. 갈대와 바이오페이퍼로 얼기설기 엮은 사다리처럼 보이는 〈넘어가는 물길을 따라〉(2025)와 울타리를 닮은 〈저무는 담〉(2025)은 사다리의 담의 효용에서 조용히 미끄러진다. 〈놓치기 위한 어망〉(2025)은 그 이름에서부터 본질로 전제되는 의도를 배반하고 유예한다. 기능을 수행하려는 의도 없이 부유하는 정원의 벽은 서로를 지탱하는 벽돌 사이의 관계에 온전히 의지한다. 하나의 벽돌이 사라지면 벽 역시 형태를 유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정원은 줄곧 물과 뭍,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만나는 공간에서 이야기와 재료를 수집해 왔다. 작품의 캡션에서 정원이 머물렀던 장소는 자신이 품었다가 내어준 것들의 존재로 스스로를 소개한다. 인천의 작은 섬들(“아차도에서 수집한 부산물”), 원전으로 어업이 중단된 울산의 마을(“울산 주전해변에서 수집한 부표”), 인공적으로 만든 호수의 섬과 저수지(“수원 저수지 인근에서 주운 부산물”), 댐 가동이 중단되어 모래가 퇴적된 강변(“미호강에서 수집한 부산물”). 여기서 정원은 사람, 비인간, 물건과 관계를 맺고, 이들이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생겨나는 역설에 주목하여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는 경계를 탐구하게 되었다. 정원의 세계 안에서 그가 머무른 적 있는 공간들은 고유한 서사와 맥락을 지닌 채,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경계의 공간”으로 수렴한다. 정원의 작업은 수많은 관계로 가능해지는 경계의 공간을 물리적 공간에 겹쳐 놓고 그곳으로 향하는 경로를 그린 지침서이자 이들을 임시적으로 불러오는 수행에 가깝다. 

지도 위 정원의 세계와 실재하는 장소를 연결하는 것은, 그의 작업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되돌아오는 존재들이다. 〈도착한 부표의 몸〉(2023)은 어촌이었던 해변에서 발견한 부표를 딥 에칭(deep etching) 기법을 사용하여 동판에서 판화지의 표면으로 전사한 것이다. 삶의 터전으로부터 주민들이 밀려난 이후 바닷가에서 오래 지낸 부표와 버려진 어업 도구들은 그곳에 원래 있었던 존재처럼 보이는 반면, 원래 바다에 머물렀던 존재인 병어는 사라져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만 남게 되었다. 사라진 병어를 재현하기 위하여 정원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수축하고 건조되는 바이오페이퍼와 섬에서 채집한 죽은 식물들을 동원한 〈우무병어〉(2025)를 만들어낸다. 병어를 원형으로 한 작품은 폴라로이드 사진과 나란히 놓인다. 사진은 작가가 시장에서 구한 병어를 석고로 캐스팅하는 과정을 담은 것이다. 한편 제목에 등장하는 둘의 유사성에 주목한 석판화 〈참깨잎과 전설의 병어〉(2025)는 구전설화의 장르성을 통해 서사를 따라가도록 만드는 지도로 작동한다. 폐기물과 작품, 인공과 자연 사이의 경계는 벽으로 나뉘는 것처럼 분명해 보이지만, 작은 존재들은 그 사이를 투과하여 서로를 바꾸어 놓는다. 정원은 이 과정이 생성하는 모든 것을 ‘부산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벼려진 의도 바깥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을 끈질기게 들여다본다. 〈소리없는 그들을 염탐하기〉(2024)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서호의 인공섬에서 살아가는 가마우지를 묘사한다. 유해 조류로 지정되어 제거 대상이 된 가마우지는 호수 주변에 버려진 비닐을 물어다가 집을 짓는다. 작가의 시선에서 가마우지와 비닐, 나무와 그 너머로 보이는 철근 구조물, 그리고 “염탐”하는 시점의 망원경 속 시야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정원은 ‘흉물’로 비난받는 가마우지의 서식지가 아름답다고 말한다. 들어갈 수 없는 섬을 멀리서 보면서, 수집한 낙엽과 바이오페이퍼로 담을 쌓고 가마우지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가마우지를 구해야 한다거나 인공섬을 철거해야 한다는 의도를 관철하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경계의 공간을 불러온다. 이들의 궤적을 종이 위에 떠내고 그 몸을 빌려 공간에 현현하게 함으로써 관찰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현상 안에 자신을 기입하는 것이다.

자신과 작품이 놓인 공간에 상호적으로 응답하고 개입하는 정원의 태도는 그를 단순히 현상에 수반되는 부산물을 모으는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공간 안에서 적극적으로 관계 맺는 연구자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탈의도적 현상학(post-intentional phenomenology)은 어떠한 사회적 현상을 분석할 때 인간의 선형적인 목적이나 의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방식으로 지향성이 작동한다고 본다. 이때 현상은 비인간과 사물, 사회적 현상과 요소가 공동으로 구성하는 복합체이며 연구자는 단일한 설명이 아니라 주변을 모두 포괄하는 지도를 그려야 한다. 정원이 관심을 기울이는 현상은 비인간주체, 인간, 사회적 구성체를 모두 포함한 복잡한 얽힘으로 이해될 수 있다. 경계의 공간에 정초해 살아가는 사람들과 연결되며 작가가 발견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아차도의 주민들이 밭일을 마치고 버리는 고춧대로 함께 종이를 만들며 ‘종이 선생님’으로 불리던 작가는 주민들이 어떤 생산적 목적도 없이 밭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돌을 치운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자신의 태도를 점검한다. 삶의 방식을 보고, 받아들이고, 그들이 되어 함께하는 과정을 통과하며 정원은 현상의 일부가된다.

서로 다른 것들이 충돌하고 스며드는 현상을 장소와 연결하는 정원의 작업에서 판화와 바이오페이퍼를 이용한 조형이라는 두 가지 재현 방식이 공존하며 서로를 지시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입체 작업이 공간에서 “빌려온” 재료들로 쌓이는 임시적인 세계를 구축한다면, 판에 잉크를 묻히고 종이에 밀어 이미지를 찍어내는 판화의 섬세한 방법론은 실재하는 공간에서 출발하여 작가가 형성하는 세계로 이행하는 경로를 그려낸다. 정원의 작품에 연관되는 모든 살아있거나 살아있지 않은 존재, 인간이 만들어낸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은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고 끊임없이 서로를 변화시키면서 숨을 쉰다. 이는 정원이 관계를 포집하고 엮어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가 바이오페이퍼로 명명한 재료는 우뭇가사리, 또는 우무나 한천으로 불리는 해초를 가공하여 감자 전분 등 다른 유기물 재료와 혼합한 것이다. 바이오페이퍼는 환경의 영향을 받아 계속 뒤틀리고 수축하므로 헌신적인 돌봄이 필요하다. 바이오페이퍼를 전시장 바닥에 펼쳐놓고 얼마나 굳었는지 손가락으로 눌러보며 보살피는 정원이 이들을 ‘페이퍼’로 부르는 이유는 그에게 종이가 현상과 해석의 세계를 떠내고 재구성하는 예민한 매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원은 작업을 시작한 이후로 줄곧 판화에 몰두해 왔다. 그는 판화의 예측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즐거워한다. 판화는 산업 혁명 때 동일한 이미지를 대량 생산하기 위해 태어났지만, 이미지의 복제가 무엇보다 쉬운 일이 된 오늘날에는 역설적이게도 지금은 작가의 정교한 기술에 기대는 공예적 매체가 되었다. 매체가 사회적 구성물로서 계속 스스로를 다시 발견하듯, 절대적인 것처럼 전제되는 인공과 자연의 경계는 사회적 흐름과 환경이나 시대, 그리고 현상들과 의도에 따라 변화하며 열려 있다. 

이처럼 정원에게 원형(prototype)이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탈각되며 자신이 생성하는 부산물에 의해 바뀌는 유기적 구성체라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동판은 끊임없이 부식되고, 물과 기름의 반발에 의해 띄워지고 흡수되어 만들어지는 석판화의 이미지는 날씨와 습도 같은 의도적으로 조정하기 어려운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정원의 작업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부표는 여러 작품의 원형이지만, 그렇게 부르기 망설여질 정도로 연약하고 희미한 존재이다. 부표가 스스로의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 역시 재귀적이다. 〈떠나간 자리에 보이지 않던 것〉(2023)은 정원이 바닷가에서 수집한 폐기물과 섞인 석고 틀로, 부표의 부재를 지시하는 형태로 남아 있다. 원형을 재생산하는 틀과 이미지가 다시 원형을 구성하면서, 완벽하게 고정된 결과물보다 놓인 장소인 전시장의 맥락이 중요해진다. 정원이 만들어낸 공간은 시간과 공간에 정초하면서도 의도 옆으로 미끄러지는 세계처럼 보인다. 

지난 가을 정원이 끓여준 차를 마시던 중 그는 문득 들뜬 목소리로 보여줄 것이 있다고 했다. 정원이 보여준 사진은 언젠가 발견한 플라스틱 그물망 위 지의류를 찍은 것이었다. 사유지를 구획하여 외부인을 막는 초록색 그물 모양의 울타리망을 의지한 채 지의류가 동그랗게 뭉쳐 있었다. 이끼나 작은 식물처럼 생겼지만 사실 조류와 균류의 공생체인 지의류는 서로의 생존을 조건삼아 아주 느린 속도로 자라난다. 정원은 오염에 특히 취약한 이 생명체가 플라스틱이라는 위태로운 표면 위에서 이렇게 크게 자랐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도, 외려 그 환경 때문에 구를 닮은 독특하고 고유한 형태를 갖게 되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어떤 존재는 의도와 무관한 다양한 얽힘 사이에서 틈을 비집고 등장한다. 플라스틱에 서식하는 지의류나 비닐로 집을 짓는 가마우지는 가능한 요소들을 동원하여 살아가고 세계를 형성해가며, 이 과정은 끊임없는 상호 구성에 의해 가능해진다. 정원의 작업은 이들을 드러나게 하는 관계와 조건을 비추면서 그 사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함으로써 현상을 새롭게 생각하게 한다. 이때 현상에 대한 지향성은 인간에게만 귀속되지 않는다. 비인간주체들, 환경과 물질, 그리고 관찰자이자 연구자이며 예술가인 정원 자신 또한 그 장 안에 포함된다. 정원의 울타리는 구역을 갈라놓고자 하는 시도도, 시작과 끝도 없다. 정원의 판화가 찍어내는 궤적과 그가 임시적으로 쌓고 조합하는 경계적 공간이 우리를 따라온다. 정원의 지도를 응시할 때, 잠깐 의도 바깥의 세계가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연동문화발전소 1기 입주예술인 평론
정원
≪꼼지락의 알리바이≫ 서문, 2025
The Fidget’s Alibi - Preface

부재를 증명하기로 한다. 실현하지 않은 움직임을 뒤집어 보이려면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꼼지락의 알리바이》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더듬거나 만지거나 밀거나 만들어내는 손의 움직임을 되짚어 올라가며 손짓의 무고를 주장한다. 스크린 위를 바쁘게 미끄러지는 손의 움직임은 하나하나 데이터화되어 시스템 안에 축적되고, 접촉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스마트폰의 화면은 신체의 연장처럼 느껴진다. 물리적 기기와 운영체제가 결합한 형태로 변환된 우리는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가능성과 의무가 남아 있는 한, 우리의 손은 어디에 있었든 알리바이를 요구하는 압박에 노출된다.

타자와 접촉하려는 의지를 띠고 움직이는 손은 끝내 스크린 안팎에서 만들어내는 잉여물과 닿는다. 이 손은 인간의 역사에서 다른 비인간동물과 구별되는 자랑스러운 표식이자, 스스로 도구와 방법을 발명해낼 수 있는 주체의 대변자였다. 전시는 이상적 주체의 상징으로서 손의 환상을 폭로한다.  〈꼼지락의 알리바이〉가 끝없이 생성하고 순환하는 샘과 액정을 겹쳐 놓으면서 자신을 휘젓는 손을 초대한다면, 〈도둑맞은 손〉은 닫힌 블랙박스의 음험한 내장을 뒤집음으로써 뜻밖의 기이함과 조우하기를 종용한다. 〈환상통〉이 전시 공간에 늘어놓는 신체를 닮은 물질은 시작과 끝 없이 상영되는 퍼포먼스에 다시 등장한다.  스크린 안의 퍼포머들은 무용한 몸(손)짓을 계속한다. 퍼포머는 손으로 아무 공간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문을 열고, 바닥에 밀착해 엉겨붙고, 거푸집에서 떠낸 손의 조형으로 얼굴을 만지거나, 도구로 다른 곳을 치며 접촉을 시도한다. 이들은 서로 다른 것에 몰두하다가 신체 일부를 닮은 오브제들을 몸에 부착한 채로 다시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소통이나 뚜렷한 목적, 생산성이 부재한 퍼포머의 움직임에 동원된 오브제는 스크린을 건너 전시가 열리는 바깥의 공간에 작품으로 나와 있다. 실종된 지시 대상은 서로를 비껴가며 간극을 상기시키고, 스크린 바깥에 선 우리의 지각 조건을 지속적으로 발명한다. 잘린 손이 기어다니는 공포 영화를 견디다 급기야 영화 끝날 때까지 스크린의 모서리를 응시했던 적이 있다. 스크린의 경계는 계속 바뀌는 픽셀과 이미지로 뒤덮이다 이내 공간을 구성하는 조건으로 귀결되었다. 전시는 관객과 작품, 스크린의 삼각구도 사이의 절단된 연결부를 드러낸다 

주(와)석은 허구적으로 연장된 디지털 육체가 중심을 잃고 글리치(glitch)를 일으키며 표면을 찢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는 스크린 사이의 얇은 틈을 손으로 움켜잡아, 실수와 비의도를 지렛대 삼아 간극을 벌리는 일이다. 작가는 스마트폰 내부가 부풀어 드러난 액정 사이 틈으로 작은 곤충의 신체가 끼어 짓눌린 광경을 상기한다. 인간이 아닌 신체가 기기의 내장 안에 잔류할 때, 정교하게 밀착되어 소프트웨어와 일치하는 것처럼 보였던 표면 아래 구조는 철저하게 물질적이고 결코 디지털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아래 붙이는 설명은 실제로 전시에서 구현되었거나 되지 않았다. 어떤 비의도적 움직임이 시스템의 안쪽에 흔적을 남길 수 있듯, 완료하지 못한/않은 시도와 실책이 공간에 잔류한다. 가장 동시대적인 기술 시연의 완벽함이 환상이라면, 창작자로서 예술가의 전문성과 저자성 역시 이 매끄러운 세계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의 틈을 신체에서 분리된 손, 인간이 아닌 몸, 뒤틀린 데이터의 형상, 아마추어적인 것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장소: Komplex Gallery (서울 용산구 후암로 59, 2-3층)
• 전시 일정: 2025년 11월 20일 ~ 11월 29일
• 운영 시간: 11:00~18:00 (일요일 및 월요일 휴무)

공연 <앙스러운 것들>
• 장소: Komplex Gallery (서울 용산구 후암로 59, 3층)
• 공연 일정: 2025년 11월 28일(금) & 29일(토)
• 관람 시간: 19:00~20:00 (약 1시간)

기획 및 창제작: 
주(와)석* (신민주×김민석)
주(와)석*은 신민주×김민석이 모여 만든 접면입니다. 
사물-기술-몸 연속체를 
다룹니다.

드라마터그: 임지애
조명 디자인: 공연화
음향 디자인: 지미 세르
의상 제작: 류은아
무대 제작: 샴푸
그래픽 디자인: 김현지
전시 서문: 김재아
기술 지원: 이두형
목공 자문: 김경언
제작 도움: 조예나, 박현호
퍼포먼스: 장유진, 이민주, 소행(서소행)
사진 촬영: 최철림
영상 촬영: 박정아
주최, 주관: 김민석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패들링 클럽: Row-ho hō-hō!≫ 서문, 2025

Paddling Club: Row-ho hō-hō! - Curatorial Statement


망원동의 예술 공간 [:틈]과 시각예술인을 위한 작업 과정 기록 서비스 ARTIWORK는 창작자가 서로의 경로를 응원하고 느슨하게 연대할 수 있는 작업 모임, ‘패들링 클럽 Paddling Club’을 함께 만들어간다. 실험적이고 개방적인 시도가 교차하는 예술공간 [:틈]은 다양한 창작자가 자유롭게 모이고 흩어질 수 있는 공동체를 상상한다. ARTIWORK 팀은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젊은 창작자들과 함께하고 있다.

올해 패들링 클럽은 창작자들이 호혜적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유연한 울타리를 짓고자 했다. 패들링(paddling)은 카약과 카누 문화에서 노를 저어 수면 위를 천천히 나아가는 행위를 뜻한다. 패들링 클럽은 방향도 속도도 서로 다르지만, 같은 수면 위에서 각자의 리듬으로 길을 만드는 패들러들로 이루어져 있다. 서로의 과정을 지켜보고 목표와 결과를 나누는 일이 미완의 시간을 통과하도록 만드는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패들링 클럽은 ARTIWORK 앱을 활용해 작업을 기록하고, 세 번의 캐치업 세션과 두 번의 렉처를 거쳐 전시 기간(2025. 9. 2. - 9. 14.)에 결과를 공유했다. 패들러들은 서로를 밀거나 끄는 대신 각자의 물살을 가르고 패들링하는 방식에서 지속 가능하고 느슨한 공동체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패들링 클럽의 여름을 담은 《Row-ho hō-hō!》는 패들러가 겪은 순간들을 따라가며, 창작이라는 여정의 항로를 그려낸다. 예술공간 [:틈]을 느슨하게 구획하는 열 개의 공간은 패들링 클럽이 함께한 시간 동안 쌓인 패들러들의 탐구 과정을 담는다. 이들은 주제를 고민하고, 새로운 매체와 재료를 실험하며 현재 놓인 삶의 단계를 작업에 반영하는 시도를 이어갔다. 동시에 패들러들은 서로의 작업에 관심을 갖고 파동을 주고받았다. 이야기와 피드백은 배를 밀어주는 목소리가 되었다. 동료와 손을 맞잡듯 연결되는 각각의 구역은 이들이 만나는 지점을 수면 위로 드러낸다.

전시 제목 《Row-ho hō-hō!》는 노를 젓는 이들이 리듬을 맞추기 위해 외치는 구호에서 착안한 상상의 발성이다. 서로의 흔들림에 조용히 응답하고, 멀리서 방향을 확인하며 함께 항해해온 관계의 흔적을 담았다. 패들링 클럽의 기록과 소식, 패들러들의 이야기를 엮어내는 진(zine)은 관계들이 교차하며 만들어낸 파동과 공명의 시간들을 불러오는 기록으로, 전체 프로젝트의 궤적을 그려내는 지도의 역할을 수행한다. 공간에 놓인 ARTIWORK 앱은 각자 충실히 쌓아간 기록을 보여주며 패들러들의 여정을 짐작하게 한다.

패들러들은 작업에 관한 상상을 공유하고 방법론을 구축하며 미완의 기획서를 꿰매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서로를 동료로 발견해왔다. 시간과 매체, 방식과 지향은 각기 다르지만 끊임없이 노를 저어 각자의 항로를 형성해간다는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각기 다른 작업 조각들은 전시장 안에서 서로를 참조하며 오롯이 개인으로서의 패들러와 공동체로서 패들링 클럽의 시간을 구성한다. 《Row-ho hō-hō!》는 멀리서 들려오는 응원의 진동이자 각자의 방향으로 향하는 길을 그리고자 한다.

(글. 김재아)

2025. 9. 2 (Tue) – 9. 14 (Sun) 10am - 7pm
예술공간 [:틈] (마포구 월드컵로 31길 6, B1)


참여 작가
김만순 
김재연 
김혜빈 
석수연 
우올로 
이범용 
이송하 
이수 
조연주 
한톨
 
주최•주관 | ARTIWORK 예술공간 [:틈] 
기획 | 김재아 전혜수 
비주얼 디렉팅 | 현수빈 
운영 • 진행 | 박선진 이채윤 
사진 | 예술공간 [:틈]


엄지효 개인전 《바르도》 서문, 2025
Bardo - Exhibition Preface





스크롤을 내리면 또 다른 허공으로 미끄러진다. 티베트어로 ‘틈’을 의미하는 바르도(bardo)는 죽음과 다음 생 사이, 윤회의 굴레에서 이탈한 잠시의 시간을 가리킨다. 사이의 영역에 떨어진 존재는 새로운 삶을 향해 끝없이 수레바퀴를 굴리지만 열반에 도달하지 못한다. 숏폼을 넘기는 손가락이 마지막에 도착하는 일을 영원히 유예하는 것과 같다. 

15초에서 60초를 넘지 않는 짧은 영상은 만나자마자 바로 다음 순간을 짐작하게 한다. 진짜 사물처럼 보이는 케이크는 곧 반으로 갈라질 것이고,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은 인터뷰에 응할 것이며, 인플루언서는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익숙한 춤을 출 것이다. 할당된 시간을 완전히 통과하기도 전에 미세한 단위로 조각내어 결말을 선취하는 소비 방식은 관람자를 응시의 대상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튕겨낸다. 패턴이 끝없이 이어지는 만화경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부유하던 정신은 홀린 듯이 영상을 넘기다 퍼뜩 멈추기도 한다 - 나 지금 뭘 하고 있지? 그러다 이내 손가락은 물레를 감듯(reel) 매끄럽게 지나친다. 자아에 잠시 부착되었던 의식은 다시 경계로 밀려난다. 

《바르도》는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이행하는 윤회의 무한한 순환 구조와 끊임없이 숏폼을 밀어내는 시간을 포개 놓으면서, 빠른 전환의 리듬에 휩쓸려 자신을 잃어버리는 비자발적 명상이 자아를 잊고 더 넓은 세계로 접속하는 불교의 무아지경(無我之境)과 연결될 수 있을지 질문한다. 수직적 구조를 구현하는 다채널 영상 설치와 관람을 위해 조작해야 하는 물리적 컨트롤러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끝없이 진동하는 숏폼의 경험을 감각 가능한 세계로 소환한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는 스크린 앞의 관람자는 가상의 플랫폼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때 숏폼은 개인화된 기기 안의 분화된 세계로부터 벗어나, 같은 차원 안에 공존하는 실재로 다가온다. 숏폼 시청이 시간의 흐름을 지연하는 것처럼 컨트롤러의 휠을 돌려 영상을 넘길수록 더 큰 저항이 발생한다. 물질세계에서 비롯된 데이터가 픽셀화된 부처-인플루언서의 형상으로 환원되는 스산한 경계적 지평 위, 바퀴를 굴리는 수행은 점차 무거워진다. 

엄지효는 짧은 콘텐츠의 문법을 충실하게 전유하면서 영상에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의 공허한 정서를 안개처럼 드리운다. 로보틱한 목소리의 내레이션이 깔리는 가운데 영상 속의 부처는 삭막한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점점 정교해지는 평면 도형을 머리에 맞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놀이공원을 배경으로 유명 캐릭터의 의상을 입고 춤을 춘다. 인간의 몸으로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은 신성한 부처의 도상은 수많은 숏폼 속 인물을 지시하는 텅 빈 기호이자 단순한 문화적 레퍼런스로 격하된다. 영상을 채우는 기묘한 거리감은  숏폼을 볼 때 익숙하게 진입하던 유사 몰입의 상태를 낯설게 돌아보게 한다. 

거친 픽셀들로 이루어진 영상은 이미 무의미해 보이는 대상을 다시 지시하며 낮은 해상도로 변형된 빈곤한 이미지(poor image)의 속성을 따르지만, 모션 캡처로 얻은 데이터를 가공하여 정교하게 작업한 결과물이다. 이는 작은 스크린에 비치는 허상 너머 실재하는 사람이 숏폼을 생산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소비자의 중독적인 시청 습관과 소모하는 시간, 영상을 넘기는 상호작용 역시 실제 세계에서 발생하는 물리적인 요소이지만, 그저 관심 경제에 이용되는 미미한 데이터로 치환된다. 생산과 소비는 서로를 가능하게 하면서 어떤 수행을 디지털 세계 안으로 귀속시킨다. 광고 영상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콘텐츠를 생산해 온 엄지효는 스스로 숏폼의 열렬한 소비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상업 또는 비상업적 영상이 생산되는 구조 안팎에서 작업을 전개한다. 엄지효의 영상은 미술/비미술, 현실/가상의 공간으로부터 동시에 이탈하고, 두 공간에 동시에 출현한다. 숏폼 플랫폼에 업로드된 작품에 대한 유저들의 반응과 댓글은 다른 영상과 다르지 않다. 이때 전시장과 숏폼은 서로를 재인식하게 하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

숏폼은 다음 영상이 나올 가능성의 무한한 갈림길로 구성된 거대한 미로이다. 보르헤스는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에서 우리는 미로 안에서 모든 것을-동시에-선택하고, 미래는 끝없이 증식하며 갈라진다고 썼다. 알고리즘에 따라 구분되는 작은 세계는 끝없이 분화하고, 모든 유행, 미적 카테고리, 유명해진 사람들의 이미지를 만화경 속 패턴처럼 무수히 펼쳐 놓는다. 우리는 같은 순간에 하나의 영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짧은 가능성을 동시에 목도하는 셈이다. 어떤 것도 출현할 수 있다는 기대와 언제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통제감은 우리를 미로 안에 계속 붙잡아두면서, 돌리기 어려운 휠처럼 무거운 죄책감을 선사한다. 이는 일상에 단단히 묶여 있는 자아로부터 이탈해 경계를 떠돌다가 방황을 자책하며 허겁지겁 다시 복귀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제나 손 닿을 수 있는 곳에 빠른 몰입을 두는 구조가 만들어낸 현상을 개인의 의지에 귀인할 수는 없다. 플루서의 말처럼 우리가 기술적 이미지에 따라 시간성을 경험한다면 우리는 이미 숏폼의 시간을 살고 있다. 윤회는 하나의 존재로부터 다른 존재로의 이행이고 이 경계적 미로에서 헤매는 일은 끝없는 진자 운동과도 같다. 지금 우리가 경계의 공간과 시간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도피와 책임의 진동은 멈추지 않더라도 느려질 수 있다. 넓게 펼쳐진 거대한 미로 안에서 소비와 생산이 서로를 포섭하는 구조는 배경이 아닌 우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존재로 다가온다.


*  본래 경계가 흐려지는 중간적 공간을 뜻하며, ‘역공간’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서브컬처의 맥락에서 익숙한 장소가 낯설게 느껴질 때의 섬뜩한 감각을 지칭하는 용어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감각은 복도, 공항, 로비처럼 대기나 이동을 위한 경계적 공간에서 일상적인 활기가 사라지고 부재가 자리를 대신할 때 출현한다.
𝓑𝓪𝓻𝓭𝓸
2025.7.5-14. 12:00-18:00
BeF Storage

기획, 제작 및 소프트웨어 개발: 엄지효 
피지컬 엔지니어: 공재이 
서문: 김재아
조형물 제작: 케이엠테크
후원: 서대문구, 청년베프


『접근성 아티스틱 리서치랩 아카이브북』, 2025
Accessibility Artistic Research Lab Archive Book

“접근성” 아티스틱 리서치랩(“Accessibility” Artistic Research Lab, 이하 리서치랩)은 접근성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기획자, 연구자, 작가로 이루어진 연구 및 창작 모임으로, 2024 〈장애예술 창작활성화 지원〉 사업을 계기로 결성되었다. 2024년 4월부터 8월까지, 리서치랩은 연구, 창작, 전시, 워크숍으로 구성되는 예술적 연구(artistic research) 과정을 통해 접근성을 다시 고민하고자 했다. 리서치랩의 이름 중 “접근성”에는 큰따옴표가 붙어 있다. 이는 접근성의 개념을 관성적으로 사용됐던 사회적 맥락에서 떼어내고자 하는 목표에서 비롯된다. 리서치랩은 현장과 보고서에서 몇 가지의 물리적 요소로 편리하게 설명되는 접근성이 실제로는 보다 복잡한 과정이자 태도에 가깝다는 문제의식을 느끼고 출발했다. 접근성이 동시대 한국의 예술 영역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기획과 창작 과정에서 접근성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지, 관객을 만나는 단계에서는 어떻게 반영되어야 할지 탐구하고자 했다. 리서치랩의 연구셀과 창작셀은 전체 홀미팅을 통해 진행 과정을 공유하고 서로의 작업에 기여하는 호혜적 관계를 형성했다. 연구자는 창작자의 작업을 연구함으로써 집합적 지식을 생산하고, 창작자는 연구자의 지식 생산에 기여하고 이를 창작 과정에 투영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연구셀에서는 문헌 연구, 참여 연구, 현장 조사를 거쳐 접근성에 관한 지식과 서울의 문화예술 공간의 접근성 정보를 담은 위키(wiki)를 구축했다. 창작셀은 연극의 접근성 도구인 음성해설과 소리 정보를 재료로 구지수 작 희곡 〈달아나다〉를 연극/영상 작품으로 창작했다. 창작셀은 9번의 만남과 회의를 거치며, 글과 미디어라는 상이한 재료를 다루는 서로의 작업 과정을 긴밀하게 이해하고 의견을 교류하며 공동으로 작품 제작에 참여했다. 연구셀의 결과물인 〈“접근성” 위키〉와 〈현장연구 노트〉, 창작셀의 결과물인 연극/영상 작품 〈달아나다〉는 프로젝트 “접근성” 아티스틱 리서치랩의 결과공유회인 전시 《비무대지대: 드러내거나 넘고 뒤집으며》에서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었다. 전시 기간 중 행사 ‘토크+에디터톤’을 열어 관객에게 창작과 협업 과정을 공유하고, 위키를 함께 편집하는 워크숍을 진행했다. 리서치랩 구성원은 결과공유회의 내용과 형식을 만드는 데에도 프로젝트 과정에서 생겨난 접근성에 대한 고민과 질문이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술회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관객은 접근성 도구가 창작의 재료로 사용된 작품을 감상하며 접근성이 기반이 되는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고, 중심과 주변, 시각예술과 공연예술, 도구와 작품의 경계를 넘는 여정의 일부가 되었다.

리서치랩의 기획은 어떤 대화에서 출발했다. 작년 겨울, 작가 구지수와 김내원이 음성해설 작가로 참여했던 연극을 관람한 적이 있었다.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을 위한 접근성 도구인 음성해설과 소리 정보가 갖추어진 공연을 관람한 첫 번째 경험이었다. 무지했던 비장애인 관객으로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무대 터치투어를 진행한다는 점도, 기기를 대여하여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는 폐쇄형 음성해설도, 무대 뒤의 큰 화면에 글자로 띄워지는 대사와 소리 정보도 흠 없이 완전해 보였다. 그러나 관람 이후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이러한 단순한 감상은 천천히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작가들은 무장애를 표방하는 큰 프로젝트에서 접근성 매니저로 참여하게 되었을 때의 기대와 막상 진행 과정에서 접근성을 위한 선택이 지속적으로 보류되거나 반려되는 경험 사이의 괴리와 고민을 털어놓았다. 작품을 둘러싼 다양한 주체와 관계 속에서 접근성은 완성도 등 다양한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거나, 관객을 만나는 단계에서 추가로 확보하는 부수적인 요소로 더해지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완성되어 있어도 어떤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시도와 태도들의 연속일 것이다. “접근성” 아티스틱 리서치랩은 옆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끊임없이 논의하고 충돌하며 커뮤니티를 만들고, 다른 언어와 영역의 경계를 넘으며 접근성을 향하고자 하는 과정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에 등장하는 전맹 미술 감상자 시라토리 씨는 자신의 꿈을 설명하면서 꿈에서 물체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는 데 정보나 개념이 적용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게 어떤 감각인지는 시라토리 씨도 정확히 전달할 수 없고, 비장애인인 저자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시각장애인도 모두 비슷하냐는 물음에 시라토리 씨는 당연히 아니라고 답한다. 실명의 시점, 장애의 정도나 유형에 따라 모든 시각장애인이 경험하는 꿈은 다를 것이다. 모든 비장애인이 꿈에서 보는 색과 사용하는 언어, 느끼는 움직임이 다른 것과 같다. 꿈의 감각은 현실의 감각을 디디고 서 있다. 다른 점은 현실에서 우리가 같은 시간과 공간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인이 같은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짐작은 여기서 온다. 그러나 다른 이의 꿈을 경험할 수 없는 것처럼, 감각을 대신 겪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예술 작품을 감각하는 것은 지극히 사적인 경험 중 하나이므로, 작품이 그에게 어떤 경험으로 현현할지 미루어 짐작하는 일은 그의 꿈에 틈입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리서치랩은 예술 작품에서 접근성이 타인의 감각을 상상하게 하는 다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접근성을 제고함으로써 감상을 용이하게 하는 데서 나아가, 관객을 만나는 과정 전반에 접근성을 접합하는 일은 접근성을 일종의 태도이자 테제로 여기는 것과 같다. 프로젝트는 ‘연구’와 ‘창작’의 두 가지 방법론을 통해 접근성을 수단이나 부차적인 요소가 아닌 태도로 체현하는 데 집중하고자 했다. 포용적인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크리에이티브 그룹 ‘아인투아인’은 연구 셀을 맡아 예술 현장 전반에서 접근성이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살폈고, 연극과 시각 예술에서 활동하는 창작자로 이루어진 ‘팀 달아나다’는 창작 셀로서 텍스트로 구성된 내러티브를 접근성 도구를 이용해 작품으로 옮겼다. 리서치랩은 예술계 안팎에서 논의하는 ‘접근성’이 실제로 적용되는 역학을 돌아보고, 접근성을 도달 (불)가능한 가상의 목표가 아니라 현장에서 작용하는 유동적인 실천이자 끊임없이 돌아가야 하는 선언으로 삼고자 했다. 프로젝트는 접근성 논의가 예술의 중심부로부터 유리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며 시작되었다. 현장에서 접근성은 행정적이거나 절차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거추장스러운 부착물로 여겨지며 도구적으로 기능한다. 이때 접근성은 작품의 본질에서 멀리 떨어진 개념으로서, 미적으로 중요한 요소를 충족한 이후인 나중의 시간성에 머문다. 결코 지금, 이 순간 필요한 우선순위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비장애인이 관객으로 상정될 뿐 아니라, 접근성이 작품에서 부수적인 요소로 전제된다는 담론적 배경이 작용한다. 그렇다면 접근성 자체가 미적 실천이 된다면 어떨까? 우리는 더 큰 것, 거시적인 것에 가려지는 개별적인 다양성에 집중하고, 예술적 개념의 경계를 더듬으며 넓히고자 했다.

작품을 관람하는 주체 간의 감각에 결코 닿을 수 없는 다름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예술 감상에 있어 감각의 통합은 일종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작품의 지지체인 각기 다른 매체를 통과하는 두 개의 비디오와 두 개의 오디오는 주체와 주체, 감각과 감각 사이를 나눔으로써 거꾸로 서로를 인지할 수 있게 한다. 키틀러가 지적하듯 기술적 매체의 발전은 통합적으로 사고되던 감각을 분리해 지각하게 했고, 감각은 매체를 통해 분리된 후에야 서로 간의 상응과 번역의 가능성을 허락하게 되었다. 관객의 관람 경험을 각자의 감각과 선택에 기대는 일은 작품의 위치를 절대적이고 마술적인 지위로부터 조합된 유기적 구성물로 이행하게 한다. 비장애인 관객은 헤드셋을 끼지 않거나, 모니터를 보지 않는 방식으로 다른 방식의 감상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감각 사이를 온전히 옮길 수는 없더라도, 서로를 이해하고자 노력할 수 있다. 담론에 균열을 내고자 출발한 프로젝트는 관객을 상상하고, 마침내 사람을 만나면서 종결 이후로 지속된다. 우리는 관객의 경험을 미리 가져와 창작의 과정에 접목하고자 했다. 이것은 경계를 드러내거나 넘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것을 뒤집는 행위의 반복으로 현실이 된다. 행위의 리드미컬한 누적이 만든 짧으면서도 긴 여정, 이것은 깊고 내밀한 경험, 일종의 꿈을 교환하고 번역하는 일에 가까웠다.


* 가와우치, 아리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김영현 역. 서울: 다다서재, 2023.
* 김남시. “매체와 감각의 질서”, 20
“접근성” 아티스틱 리서치랩 아카이브북

발행일 | 2025년 2월 28일

기획 | 김재아
디자인 | 고재현
글 | 고재현 구지수 김내원 김재아 박준우 박현일 박현진 황재현
편집 | 김재아
후원 | 서울특별시,서울문화재단

ISBN 979-11-991300-0-5 (03060)


본 출판물은 2024년 〈장애예술인 창작활성화 지원〉 선정 사업 〈“접근성” 아티스틱 리서치랩〉의 연구결과물로 제작되었습니다.






테두리를 더듬어 가능한 연대
『*c-lab 8.0 자료집 CHORUS』, 2024
“Solidarity Through the Tangible Boundaries”, *c-lab 8.0 CHORUS



사진 일상의실천

당장 걸려 넘어지는 비극이 만연한 사회에서 예술과 미술관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c-lab은 과거로 돌아가 대답이 될 만한 것을 찾고자 했다. 마술적이고 강력한 무언가 필요했다. 사람들을 묶어 놓고 감정을 터뜨리게 할 수 있는 무언가. 코러스를 대안으로 상정하고 *c-lab 8.0의 기획과 운영에 참여하는 몇 달간 '함께 노래하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함께 노래하는 일은 아름답다. 교묘하다. 평화롭다. 명시적이다. 열띠다. 표현적이다. 파괴적이다. 치유적이다. 배타적이다. 여기에 무엇까지 올려놓을 수 있을까? 코러스는 그리스 비극에서 여러 배우가 군중의 목소리를 대변하여 같은 노래를 부르는 부분이었다. 시민인 관객을 대변하는 목소리이자 다수의 사람이 공적 장소에서 발언할 수 있게 한 형식인 코러스가 민주주의와 비슷한 시기에 출현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코러스는 예술과 정치, 사회의 영역에 걸쳐 사람을 모으고 구획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노래/말/사운드/진동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제가 된다. 국민의례에서 불리는 애국가 제창부터 시위 현장에서 불리는 아이돌 가요까지, 오늘날도 합창은 사람들을 묶는다. 이때 같이 노래하며 느끼는 소속감은 공동체를 결속하는 내면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그런데 합창이 집단을 만드는 단단한 경계라면, 테두리의 바깥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노래를 부르지 않는 이나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이도 연결될 수 있을까. 끈끈하게 결속된 공동체는 바깥에 누군가를 남겨둠으로써 가능하다. 공동의 비극을 초월하는 연대가 코러스에, 예술에 기댈 수 있을지 궁금했다.

*c-lab 8.0의 참여 아티스트, 랩메이트와 같은 주제를 탐구하며 다양한 관점을 접할수록 거꾸로 코러스가 어떤 것인지 점점 알기 어려워졌다. 어떤 이는 코러스를 통해 비극에 대응하는 예술 실천을 만들고자 했고, 다른 이는 예술이 비극을 위로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했다. 합창단처럼 다른 목소리를 가지고 하나의 주제를 이야기하도록 묶인 우리는 코러스를 여러 모습으로 상상하고자 했다. *c-lab 8.0 안에서 잡음을 내는 전자 기기, 소리의 구조가 촘촘히 짜인 오케스트라, 같은 공간에서 다른 움직임을 수행하는 몸, 서로 다른 성별과 나이, 민족의 사람들은 모두 코러스가 될 수 있었다. 코러스는 반드시 노래(합창)일 필요도, 인간(합창단)일 필요도, 공연의 형식을 갖출 필요도 없다. *c-lab은 코러스를 '여러 존재가 함께 특정한 예술 실천을 수행한다'는 형식이자 다양한 이들이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으로 확장했다. 함께 진동하는 일의 구심력을 이야기한 세 팀의 아티스트는 각기 다른 부분에 주목했다. 전형산은 사운드를 생성하는 구조에, ‘코끼리들이 웃는다’는 '함께'의 의미에, 송주원은 코러스가 담지한 위로에 초점을 맞췄다.

전형산 작가는 전시 《백그라운드 보이스》의 사운드 설치 작업을 통해, 소음으로 받아들여지더라도 주변부에서 끊임없이 소리를 내는 존재를 조명했다. 신작 〈백그라운드 보이스〉의 스피커 16개는 관객이 녹음한 목소리를 실시간으로 합성해서 각자 다른 사운드로 출력했다. '소리 객체'로 불리는 작품 각각이 내는 작은 소리는 합쳐져 커다란 음풍경을 이루었다. 작품이 출력하는 소리를 녹음하는 관객 역시 소리 객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구체적인 사운드보다 소리 객체를 소리 객체가 되게 하는 구조에 집중할 것을 주문했다. 《백그라운드 보이스》에서 코러스는 전시장을 채우는 소리나 작품이 아니라, 존재가 소리를 내도록 만들고 포섭하는 구조에 가까웠다. 전시는 관객과 작품, 인간과 기계의 구분을 지우고, 동일하게 소리를 내는 존재로 호명했다. 전형산의 코러스 안에서 구조와 개인, 중심과 주변의 경계는 분명했지만, 모든 소리 내는 존재는 같은 위치로 지정된 것이었다.

선명한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을 단단하게 결합하는 프로젝트도 있었다. 〈마주하는〉에서 커뮤니티 기반 극단 '코끼리들이 웃는다'는 함께 작업했던 커뮤니티를 처음으로 한데 모아 관객과 눈을 맞추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약 1분 동안 언어 없이 다양한 이들을 마주 보는 행위, 물리적으로 가까운 타인에게서 느껴지는 강렬한 교감이 관객과 배우를 코러스로 바꾸어 놓았다. 긴 시간 생경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은 나를 드러낸다는 불안과 취약함을 느끼게 한다. 이 경험이 타인의 존재에 대한 감동과 동시에 방어적인 불편함을 느끼게 했다는 사실은 관객과 배우, 공연을 하나로 모은 감정이라는 연결고리의 강력함을 방증한다. 마주 보았던 배우의 얼굴은 오래 기억에 남아, 다시 만나 이야기 나누는 상상을 하게 했다. 어떤 집합의 외벽은 두터워 안의 이들이 바깥에 나갈 수 없도록 사로잡는다.

송주원의 〈비극과 코러스: 움직임 합창〉의 코러스는 가장 느슨하고 다양한 요소로 결합한 연대를 형성했다. 참여자는 재난에 대한 느린재난연구실 연구자의 강연을 듣고 팀을 만들어 주제와 관련된 질문을 나눈 뒤 공간을 움직임으로 채웠다. 움직임 '합창'을 시연할 때 관객, 강연자, 무용수, *c-lab의 큐레이터까지,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지속했던 고민과 외로움을 메모지에 적힌 질문과 신체의 움직임으로 표현했다. 역할과 경계를 넘어 동시에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다른 이들과 포개어지는 경험이었다. 즉각적으로 형성되는 커뮤니티에 놀라워하자, 안무가는 "몸으로 하는 일이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비언어적 교감과 정확한 언어의 공유가 겹칠 때 코러스는 성립되기도 한다.

아티스트가 그린 다양한 모습의 코러스는 리스닝투게더의 연사, *c-lab 8.0과 주제적 탐구의 여정을 함께하고 다양한 텍스트를 생산해온 랩메이트, 그리고 관객에 의해 관찰되고 수용되고 그 의미가 변화되어갔다. 이야기를 나누는 토킹투게더, 같은 글을 읽는 리딩투게더에 이어 새로운 형태로 선보인 *c-lab의 강연 프로그램 리스닝투게더는 강연에 참여한 모두가 동시에 같은 음악을 들으며 코러스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선사했다. 랩메이트는 *c-lab과 연결되어 있지만 바깥에 위치한 존재로서 주제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더하고, 코러스의 역할로 '공동 기억화'를 연구하여 *c-lab 8.0 리서치 딜리버리의 마지막을 구성했다. 랩메이트와 주제인 코러스에 대해, 사회에서 예술의 역할에 대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일이 얼마나 놀랍고 감동적이고 어색했는지에 대해 나누었던 공감과 대화가 소중하고 즐거웠음을 고백한다.

코러스는 여러 사람이 동시에 목소리를 내는 일을 일컫는 말이자 목소리를 내는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다. 코러스에서는 행위(합창, chorus)가 곧 그 사람(합창단, chorus)을 의미한다. 즉 코러스는 여러 사람을 묶어서 이를 뿐 아니라, 각 개인의 수행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 속해 있기 때문에 코러스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식이든 예술에 참여하고 실천을 하는 행위가 그를 코러스로 만든다. 주제를 처음 접했던 시기에는 코러스의 테두리가 배제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러나 횡단을 위해 그어지는 선도, 이전에 연결된 적 없던 이들을 이어 주는 선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코러스에 수많은 결이, 모습과 형태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함께 노래하는 일은 앞서 늘어놓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c-lab 8.0은 사람들에게 코러스가 될 공간을 제공하면서 실천하는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열고자 했다. 주제문에서처럼 *c-lab 8.0을 만났던 관객이 무대 바깥에만 머물지 않고 코러스로 변신하고 이입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면 코러스를 설명하는 구획은 유연하게 확장된 것이라 할 수 있을 테다. *c-lab 8.0이 만들었던 코러스 바깥에도 여전히 남겨져 있는 존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코러스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안팎을 살피며 출렁이고 변화하며 넓어져 갈 것이라고 믿는다.
*c-lab 8.0: 코러스 Chorus

발행일 | 2024년 10월 25일

주최 | 코리아나미술관
관장 | 유승옥 유승희
학예팀장 | 서지은
기획/운영 | 
최선주 김재아
운영지원 | 김지선
디자인 | 일상의실천
후원 | (주)코리아나화장품









《향하는 귀, 흐르는 걸음, 벌어진 사고》 리뷰, 2025
‘Heading Ears, Flowing Steps, Unfolded Thought’ Review

소리는 어디에나 있다. 다른 파장의 진동은 늘 존재하고 변화하며, 감각하는 신체를 지나치거나 통과한다. 듣는다는 행위는 끊임없이 지속되는 수많은 파장 가운데 의미 있다고 파악되는 어떤 것을 떼어내어 지각하는 것이다. 들었다고 생각하는 감각은 시간이 흐르면서 재조직된다. 나는 친구의 목소리, 실외기의 진동, 도로의 자동차 경적 소리를 동시에 감각하지만 10초 뒤에는 친구의 목소리만을 들었다고 생각한다. 유의미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소리만 ‘들리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들리는 소리만이 유의미한 소리이다. 그렇다면 소리들을 펼쳐놓고 듣는 행위를 새롭게 쓰는 일은 같이 존재하는 이들로 연결된 관계와 의미망에 진동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참여자는 홍제천 주변 커뮤니티의 구심점이 되는 장소이기도 한 공간 ‘보틀팩토리’에 모여 사운드워크의 진행 과정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기기 작동 방식을 전달받고 함께 출발했다. 쏟아지는 햇빛, 낮은 건물들과 익숙한 보도, 여유롭게 걷거나 뛰는 사람들과 자전거, 강아지, 새, 곤충. 무엇보다 공연을 내내 관통하고 있었던 것은 듣는 행위를 보조하는 장치를 조작하고, 이를 통과하여 형성되는 사운드를 감각하는 행위였다. 참여자는 개인 스마트폰에 위치 정보를 인식하는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 받아 스마트폰 화면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경로를 찾아갔다. 특정한 구역을 지나는 동안 스마트폰에 연결된 헤드셋에서 작가들이 만든 사운드인 ‘뇌절 트랙’(안민옥), ‘날씨같은 소리’(신원정)가 재생되었다.

함께 출발한 참여자들과 걸으며 애플리케이션을 제대로 작동시키려고 애쓰며 미숙한 조작 때문에 ‘들어야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동안, 우리는 어떤 소리가 들리고 어떤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계속해서 서로에게 물었다. (뽕짝 음악 들려? 밖에서 들리는 거야? 헤드셋 연결 제대로 된 거 맞아?) 헤드폰 속 전자 사운드와 우리가 디바이스를 연구하느라 떠들던 소리,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 자전거 벨 소리가 중첩되었다. 지금 느끼는 감각과 의미를 찾아내는 방식에 대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소리 안에서 금방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확신에 찬 신체로부터 감각을 위해 장치를 이용하는 신체로 이행했다. 장치는 필요한 감각을 가능하게 하는 보철로서 기능했고, 확장된 신체가 삐걱거리는 상황은 이 모든 혼합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발을 옮기는 움직임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향하는 장소와 통과하는 소리는 정해져 있었지만, 리듬과 경험은 저마다 다르게 펼쳐졌다. 경로의 마지막 장소인 전시공간 ‘미학관’으로 가는 길에서 농구 코트를 지나는데 농구공을 튀기는 소리가 들렸다. 헤드셋에서 들리는 소리가 실시간으로 공간에서 들리는 소리로부터 합성된 것인지 원래 조직되어 재생되는 사운드인지 판별하기 위해 우리는 잠깐 앉아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 소리는 어떻게 생겨나서 어느 공간에 머무는가? 어디서 오는가? 이를테면 그 소리는 거기에 있고, 내가 그 공간에 감으로써 소리가 내게 오는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장소로 이동하는 행위가 소리를 만들어 내나? 이 소리는 어떤 장치를 거쳐야 하는 소리인가? 헤드셋에서 들리는 소리와 바깥의 소리를 편평하게 펼치고, 한 겹씩 쌓고, 흩어서 서로 이으면서 질문했다.

장치를 이어 붙여 신체를 확장하는 경험은 나와 공간의 경계를 탐색하고, 같은 맥락에 함께 놓인 다른 존재자와 다르게 연결되는 것이기도 했다. 뇌절 트랙을 지나 도달한 다리 밑에서는 안민옥 작가가 직접 제작한 소리 확성 장치 ‘궁극귀-노노’를 소개하고 있었다. 커다란 플라스틱 장치는 홍제천의 작은 소리를 모아 물리적으로 귀에 전달했다. 작은 물줄기에 궁극귀 노노를 갖다 대자 이전에 들어 본 적 없는 큰 볼륨의 물소리가 들렸다. 홍제천을 지나는 주민들은 특이한 색의 플라스틱을 물에 들이대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며 기웃거렸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했다. 구경거리가 되는 묘한 뿌듯함은 우리가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홍제천을 흥미롭게 보이는 공간으로 만드는 요소로 공간에 기입되고 있다는 자각에서 오는 감정에 가까웠다. 우리는 보철을 경유해서, 이 확장된 물리적, 전자적 신체를 제대로 사용하고자 애씀으로써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공간에 합성되고 있었다.

들으면서 걷는 동안 곁에 머물렀던 소리 중에는 정해진 공간을 지나는 동안 헤드셋에서 들을 수 있었던 전자 사운드, ‘궁극귀’를 통해 들었던 홍제천의 물소리나 새소리, 라디오에서 참여자의 코멘트를 읽어주던 목소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곁에 계속 머무르며 변화했던 홍제천의 소리가 있었을 것이다. 이 소리들은 홍제천의 존재들에서 확장된 것이거나, 무관해 보이지만 다른 방식의 듣기를 제안하는 종류의 파장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참여자들이 공유한 텍스트와 사진을 읽어주는 ‘환삼덩굴 라디오’를 들을 수 있었다. 라디오에 보낼 사진을 찍으려는데 징검다리 한복판에 고양이를 품에 안고 앉아 있는 아저씨가 보였다. 짧은 대화에서 그가 고양이에게 물이 흐르는 것을 보여주려고 매일 홍제천에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후 사운드워크에 참여했던 다른 동료로부터 같은 고양이와 아저씨를 목격한 사진을 받았다. 고양이는 아저씨의 어깨 위에 잠자코 얹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듣기 위해 귀를(관심을) 기울이면서 걷는 행위는 다른 시간에서 같은 존재와 여러 방식으로 연결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위험! 가볍게 산책하기
웹진 『비유』 65호, 2024
Walking Around Warning Signs



서로 다른 것들이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위험한 가능성들을 열어두자는 야심찬 의도로 출발한 만큼, ‘위험포럼’은 구상 초기부터 열린 구조를 가진 기획이었다. 계획 하에 달성해야 하는 과제와 도달하는 지점이 분명한 여행보다는, 몇 가지 원칙만을 세워두고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채로 떠나는 여정에 가까운 궤적을 그리는 것이다. ‘위험포럼’을 기획한 매개자들은 보편적인 발견을 목표하기보다 우연찮게 발생하는 상황과 상호작용들 자체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두껍게 기술하고자 했다. 창작자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배경과 작품 세계, 이들이 가지고 있는 요인들이 충돌할 때 어떤 상황이 일어나는지 목격하는 것이 ‘위험포럼’ 의 의미를 구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작가이자 장애인 운동가인 해리엇 맥브라이드 존슨에 따르면 이야기는 우리가 경험을 공유하게 하는 가장 친밀한 도구이자,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서 있는 곳,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유일한 가능성이 아님을 깨치는 가장 근본적인 기회를 마련해주기도 한다.1) 매개자가 목격한 ‘위험포럼’ 모둠의 김진주, 김민이, 신영은 작가는 각 창작자와 매개자가 구성한 단단한 세계의 외벽에 금을 내고, 역할을 뒤섞는 반가운 혼돈을 만들어냈다. 이 혼란스러운 경험은 모둠의 구성원들이 가진 서로에 대한 막연한 호의와 수용에 바탕을 두었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의 사적인 삶을 잘 알지 못하더라도, 좁은 틈으로 궁금함과 서로의 방법을 시도해보고자 하는 기꺼움이 오갈 수 있었던 것이다. 모둠을 이룬 세 명의 예술가는 몸담은 장르도, 사용하는 매체도 상이했다. ‘위험포럼’을 계기로 처음 마주한 작가들은 함께 창작을 하기 위한 공통분모를 개인의 삶이나 작업에서 찾기보다, 이들을 불러 모은 것에 대해 이야기 하기로 했다. ‘위험포럼’의 위험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각자에게 ‘위험’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연극의 극본을 쓰는 한 작가는 “아무런 가이드라인도 없이 자유롭게 공동창작을 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게 느껴진다”고 털어놓았다. 요구되는 마감과 기준이 없다는 데서 오는 불안이 위험으로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행정적이고 절차적인 조건들은 창작물의 효율적 생산을 돕기도 하지만, 창작 과정의 틀을 지어 예상 가능한 결과로 수렴하게 만들기도 한다. 창작자들은 국가나 재단의 지원을 받고 작품을 만들어내는 구조 안에서 이러한 기준에 익숙해졌고, 또 의지해왔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 특정한 형태의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당연했던 영역에서 벗어나, 어떤 것도 정해지지 않은 미지의 공간으로 던져진 것이다. 어떤 기준을 만족시켜야 하는지 몰라 불안한 마음은 ‘전문적으로’ ‘잘’ 해야 한다는 부담과 맞닿아 있다. 프로 극작가, 미술 작가로서 기대되는 창작물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일 것이다. 다른 작가 역시 그림을 ‘잘’ 그리는 것에 대한 압박에 대해 토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다시, ‘위험포럼’에서 정해진 것은 없다. 여기서는 시각 예술가가 회화 작업을 해야 한다거나 극작가가 연극을 만들어야 한다고 기대받지 않는다. 창작자들이 ‘전문 분야’에서 벗어나 모르거나 해본 적 없던 일을 해도 되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공동창작을 ‘잘’ 해낸다는 과제를 정면 돌파하는 대신, 가볍게 우회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작가들은 여기서 출발하기로 했다. 전문가로서 늘 해오던 영역을 벗어나 스스로의 새롭고 서툰 모습을 마주하기로 한 것이다. 이들은 각자 익숙하지 않은 서로의 작업 방식을 채택해보기로 했다. 시각 예술가는 극본을 쓰고, 극작가는 그림을 그린다. 전문적이고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벗어나 오히려 가벼워진다. 이때 공동창작은 역설적으로 전업 작가이자 예술가, 창작자로서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과정이 된다. 여기에는 서로의 작업과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자리했다. 발로 식물의 섬세한 선을 그려내는 구족화가로 활동하는 김진주는 늘 대담한 이야기를 써내고 싶어했다. 한편 인간 내면을 표현하는 회화 및 설치 작업을 해온 김민이는 신체의 다양성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신영은은 사회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극본으로 써왔고, 시각예술과 전시라는 형식을 흥미로워했다. 마지막으로 예술로 정의되는 장 주위를 맴돌며 사람들을 연결하는 기획을 시도해 온 나 역시 전에 없만들어내는던 것을  행위인 창작에 매료된 사람이었다. ‘위험포럼’과 위험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전문가의 구획을 벗어나 초보로서 다른 방식을 시도하는 굽이진 우회로를 택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매개자인 나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이 얼렁뚱땅 공동창작의 여정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단순히 기록자이자 관찰자의 자리에 머물고자 했던 의도가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작가들은 거리낌 없이 매개자를 창작의 영역에 초대했고, 나 역시 이 모둠의 구성을 ‘위험포럼’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예술가들과 틀을 만들어 낸 기획자로 역할을 나누기보다, 공동창작이라는 실험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모둠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점에 있어서 기획과 창작의 경계는 희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험포럼’의 성격을 고려할 때, 매개자로 명명된 역할의 기획자들은 창작자들의 협업 과정에 어디까지 개입하고 협업할 수 있는 것인지, 또는 해도 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가 된 모둠은 가볍게 가기로 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나이나 가족의 형식 등 사회적으로 고정된 명목에서 서로의 공통점을 찾기보다는, 호오와 생각하는 방식에서 교차하는 지점을 찾아냈다. 알고 보니 우리는 모두 찬찬히 둘러 걷는 산책을 좋아하는 이들이었다. 매개자 역시 복잡해 보이는 질문을 고민하느라 멈춰 있기보다 가볍게 둘러가기로 했다. 우선 시도하고, 만들어본다.

우리의 시도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하나, 모둠에 속한 다른 작가의 방식을 빌려 각 창작자가 기존에 해본 적 없는 창작 방식을 시도한다. 둘,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창작한다. 셋, 여기서 ‘모두’는 매개자를 포함한다. 넷, 방식은 ‘키워드로 희곡 쓰기’와 ‘다른 신체로 드로잉하기’이다. 다섯, 매주 써온 희곡을 역할을 정해 낭독하고, 남은 시간은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채운다. 위의 사항들은 우리가 합의해서 확정한 것이라기보다 재미있는 일들을 하다가 정착한 것에 가까웠다. 우리가 함께한 방식 중 하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사용해본 적 없는 신체 부위로 드로잉을 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신체를 사용해보면서, 정교한 작업에 손 대신 발이나 음성 인식 등 다른 방식을 사용하는 김진주가 경험해온 사회적 의미의 장애를 창작 과정에 포함하고자 했다. 김진주는 발이 아닌 손으로, 다른 사람들은 손이 아닌 부분으로 펜을 잡고 그림을 그렸다. 몇 번 서로를 크로키 하면서 이 방법을 테스트해본 작가들은 몸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여 함께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일종의 퍼포먼스로 전환하기로 했다. 커다란 종이를 이어붙이고 그 위를 구르고 기며 그림을 그려나가는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했다. 누운 채 머리 위로 손을 뻗어 눈으로 보지 않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김진주의 방식을 따라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에 펜을 끼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팔과 다리가 접히는 부분을 그릴 때는 몸을 땅바닥에 붙여야 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이용하는 신체는 생각보다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아 우리는 몇 번의 삐끗거림과 실패, 경직되고 고통스러운 신체를 경험했다. 이는 김진주가 겪어온 시간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지만, 그의 방식에 조금씩 익숙해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몸은 창작물을 제약하거나 구성한다. 그러나 그림은 몸이 그려내는 것임과 동시에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구현하는 과정이기도 하므로, 신체를 이용하는 방식만이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퍼포먼스가 끝나고 그림을 돌아보니 누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모둠이 함께 시도한 방식 중 다른 하나는 키워드를 정해 희곡을 써오는 것이었다. 모임 시간에 한 명씩 단어를 선정하고, 이 단어들이 모두 들어가는 극본을 만들어와 다음 모임에서 낭독을 해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한 주 동안 쓸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양의, 그러나 소소하지만은 않은 다양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공동창작이라 하기엔 저자가 분명한 작품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개지는 부분이 있는 작품들은 여러 시리즈의 창작물들로 탄생하였다. 이들은 함께한 창작의 결과물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작가들이 서로를 알아가고 세계관을 파악하며, 공동창작에서 함께 다룰 것들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표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우리가 모임에서 가볍게 나눈 이야기들은 희곡에 섞여 들어가기도 하고, 희곡에서 출발한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임의로 정한 단어들인 ‘캐나다’, ‘사과’, ‘머리카락’으로 희곡을 썼을 때, 누군가는 머리카락을 치우는 문제로 싸우다가 캐나다로 떠난다는 사실을 통보하고 사과를 하지 않는 연인들의 이야기를 썼다면, 다른 이는 이전에 나누었던 대화에 등장한 장애인 화장실을 주제로 한 희극적이면서도 번뜩이는 비판적 날이 서 있는 작품에 키워드들을 집어넣었다. 장애인 화장실이라는 꼭지가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에 문득문득 등장하다가 창작물의 주제가 된 것이다.

모임 초반, 각자의 경험에 비추어 위험을 정의했던 대화에서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의 입주 작가인 김진주는 센터 내 장애인 화장실에 관한 당혹스러운 경험을 이야기했다. 자동으로 잠기는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하던 도중 그만 고장 난 문이 열려 버렸던 것이다. 이용하는 동안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는 시간을 약속하는 화장실 시스템의 붕괴는 충격과 민망함을 넘어 불신으로 이어진다. 사용자의 편의와 안전을 지켜줄 것이라는 당연한 믿음이 깨지는 것이다. 이후 화장실 문에 ‘고장, 문이 닫혀 있으면 열림 버튼을 누르지 마시오’라는 안내가 붙기는 했지만, 그는 이후 센터의 화장실뿐 아니라 어떤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하더라도 언제 문이 열릴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마침 그 자리의 세 창작자 모두 화장실 문과 관련된 당황스러운 에피소드가 있었다. 나 역시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하다가 밖에서 누군가 문을 열어버린 상황에 처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고안된 테크놀로지들은 종종 실패하고, 열려 버린 화장실 문처럼 우리의 삶에 황망한 구멍을 남긴다.

위험에 대한 이야기들은 희미하게나마 작가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문제의식의 교차로를 드러내주었다. 우리는 장애인 화장실로 대표되는 사회적 장치들에 대하여 생각해 봤다. 예기되는 위험과 불편을 줄이기 위해 도입되는 기술들은 매끄러워 보이지만, 사실 필요할 수도 있는 일상 속의 덜컹거림을 지워 버린다. 편리해 보이는 닫힘 버튼과 널찍한 화장실 공간보다, 단순해서 한 손으로도 문을 잠글 수 있는 걸쇠와 언제든 잡을 수 있게 가까운 문이 더 마음 놓일 수도 있다. 카운터 앞의 긴 줄을 피하기 위해 키오스크를 사용하는 것이 어렵고, 직원에게 직접 주문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이 사회에서는 모두가 능숙하게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빠르고 효율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은 상황과 신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화장실 사용은 가장 원초적인 욕구와 밀접한 행위이자, 사회적으로 인간답다고 대접받는 존엄에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가장 직관적이고 신체적인 문제들과, 문명사회에서 이를 처리하려고 동원하는 기계적 시스템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장애인 화장실을 희곡에 등장시킨 김민이는 이 시스템이 실패할 때 발생하는 구멍들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는 명목의 형식과 기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작품에는 화장실을 연구하기 위해 캐나다로 떠난 연구원들이 한국에서는 장애인 화장실 봉기가 일어났다는 심각한 사건을 전한다. 한편 작가들은 공통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지 질문하기 시작했다. 서로가 가진 세계관을 충돌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 명의 작가들과 매개자가 공동창작의 시간 동안 사적인 이야기를 많이 나눈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같은 단어가 담긴 다른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우리는 서로가 가진 세계에 대하여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동일한 단어들에서 출발하더라도 누구는 사람들 사이의 미묘한 감정 흐름에 대해, 누구는 평소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를 빌려, 누구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구조적 문제와 관련하여 이야기를 만들었다. 각자가 만든 작품의 차이를 만든 바탕을 가늠해보는 일은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는 일과 맞닿아 있었다. 김진주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별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궁금하여 물어보니, 그는 어렸을 때 천문학과를 가고 싶어 별들을 보고 공부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지금도 별의 이름을 외운다. 식물들의 잎맥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작업에 깔린 밀도 높은 관심과 관찰력은 자연에 대한 앎의 집요한 열망에서 왔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현재 삶에 대한 세부 사항을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모임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다른 이들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넓혀 갔다. 이때 중요한 것은 창작자와 매개자 자신의 경험과 비슷하지 않더라도, 호의와 존중을 기반으로 한 느슨한 연대가 사적 영역에서 펼쳐졌다는 것이다. 모든 과정은 창작의 기반이 되는 작가 개인의 시간을 더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는 길이기도 했다. 가족 구성원인 어린이의 건강이 좋지 않아, 장애인 콜택시의 엄청난 배차 간격과 불편한 이용 방법 때문에, 생업에 종사하느라 우리가 정시에 함께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양해를 구하고 기꺼이 다른 방식을 찾아보는 일을 거듭하며, 우리는 더욱 유연한 공동창작의 과정을 밟아 나갈 수 있었다. ‘위험포럼’을 마주한 이 모둠의 방식을 가벼운 산책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직면한 위험을 피하거나 급진적으로 돌파하지 않고, 그 아래 위를 지나는 우회로를 함께, 가볍게 산책하는 것이다.  


1)Harriet McBryde Johnson, Too Late to Die Young: Nearly True Tales from a Life, (New York; Henry Holt and Company, 2006)